2019/09/26 쉐락볼튼(kjeragbolten)
이날의 여정을 어떻게 다 말로 할까. 정말 어마어마한 날이었다.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양8경 뭐 이런 거 붙이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지 않음? 그래서 노르웨이 3대 트레킹 코스라는 것을 정해 놓았는데(확실치는 않지만 난 한국인들만의 셀렉션이라 본다_이후 검색해보니 모두가 공인하는 3대코스인 걸로 밝혀짐) 프라이케스톨렌, 쉐락볼튼 그리고 트롤퉁가다. 전날(25일) 우리는 앞 포스팅에 썼다시피 프라이케스톨렌을 정복했다. 사실 정복이랄 것도 없는 무난한 산행이었지만. 프라이케스톨렌을 다녀오니 우리도 3대 코스를 정복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닌가.. 이어서 쉐락볼튼에 가기로 했다.
쉐락은 프라이케스톨렌보다는 난이도가 좀 있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등산 시즌은 6-9월. 길이?는 10km, 산행 시간은 6시간이며 570m의 높이를 올라야 한다고 나온다. 등급은 red다. 경험 있는 등산객들과 성인들을 위한 루트. 진짜 만만치 않다. 차차 이야기하겠음. 근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일단 우리 숙소는 Jørpeland이고 목적지는 Kjerag parking인데 중간에 페리를 타야 했다는 것. 페리 시간은 비수기라 무려 6:35, 14:30 두 번 뿐이었다. 근데 그나마도 오후 페리는 캔슬. 선택지는 6:35뿐이었다. 초행길인데다 새벽에 운전을 해야 하므로, 5시가 되기 전에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우리 내일 새벽에 쉐락볼튼 갈 거라 지금 인사할게. 안녕" 하고 일찍 잠들었다.
4:40인가 일어났는데.. 거의 뭐 한밤중이었다. 9월 말의 노르웨이니 날도 꽤 추웠다. 여담인데 산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옷을 정말 많이 입고 있다.. 일단 네비에 songesand kai를 찍고 출발했다. 근데 아래 지도에서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반 산길이다. 중앙선이 없는, 1.5대가 지나갈 만한 도로가 노르웨이에는 참 많은데 이 길도 내내 그랬고, 네비를 따라가긴 하는데 밤이라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산길이라 무섭고 혹시 맞은편에서 차 오면 어떻게 지나가지 페리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나 암튼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마무시하게 무섭고 1시간 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차 한 대도 안 만났고(그 시간에 거기 다니는 차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도로 바로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양들만 몇 마리 만났다. 페리 시간 30분 전에 도착했으며 선착장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에서는 캠핑 짐을 지고 그 새벽에 선착장으로 걸어가는(!) 젊은이 2명도 보았다. 선착장에 차를 세우고 페리를 기다리는데 차 안에 있어도 너무 추운데다 제 시간에 배가 안와서 저 젊은이들을 길에서부터 태우고 와 있을 걸 후회가 됐다. 5-10분쯤 지나서 페리가 도착했고 차를 실은 후 실내에 들어간 우리는 잠에 빠졌다..
뤼세보튼에 도착하니 그래도 날이 많이 밝아 있었다. 다시 꼬불꼬불 살벌한 헤어핀이 있는 길(지도 확대하면 보임)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또 기가 차는 일이 벌어지는데, 주차장에 들어서는 우리를 안전요원이 막아 세운다. 오늘은 등산하기에 날이 너무 안 좋고 f***ing dangerous하니 그만 내려가라고. 바람이 좀 많이 불기는 했다. 시즌이 9월까지니 간당간당한데다 잔뜩 흐렸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 사람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차 완료한 차도 있고 우리처럼 차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 대충 아침을 먹으면서 창밖을 살펴보니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와중에 올라가는 사람도 있었다. 위험할 것 같아서 안그래도 걱정이 많은 나는 엄청 고민했는데, 그래도 오늘 아니면 올 일이 없을 것 같아 도전. 그리고 일단 가보고 정 아니면 내려오자 싶었다. 주차 기계에 돈을 내고, 안전요원이 한 번 더 우리를 설득하려 했지만.. 옷을 챙겨입은 후 산행 시작.
위의 그림에 나와 있듯이 쉐락볼튼 하이킹 코스는 총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높고 넓은 쉐락(Kjerag)의 이름을 따서 목적지인 계란 바위의 이름을 쉐락볼튼이라 지었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봉우리가 죽을만큼 힘들었다. 왜냐... 일단 봉우리를 오르고 내려가기까지 거의 내내 쇠줄을 잡고 이동해야 하는 경사다. 초속 14-15m의 바람이 불고, 플렌스부르크에서 급하게 산 손가락 부분은 잘린 웨이트용 장갑을 끼고 올랐다(등산용을 사고 싶었으나 없었음). 날도 춥고 손 시리고 바람 때문에 눈물 나고 경사는 말도 못하고.. 첫 번째 봉우리를 다 올랐을 때 진심 다시 내려가야하나 고민했다. 이 정도 바람이면 정말 위험하긴 하니까. 정말 무지막지한 바람이 불어 잠시 앉아 기다리니 또 바람이 처음보다는 많이 약해졌다. 이거 올라오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아까워서 다시 길을 나섰다.
두 번째 봉우리부터는 훨씬 수월했다. 첫 번째에서 혼이 쏙 빠져서인지 나머지는 그보다는 쉽게 느껴졌다. 우리 말고는 보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놀랍고도 무서운 풍경에 우리 둘만 있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정말 SF 작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 어디서도 겪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조난 같은 상황을 생각해도 주위가 우리 나무 우리 산이라면 (물론 무섭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여기보다는 덜 공포스러울 것 같은데, 여기는 정말 별세계에 갑자기 뚝 떨어진 기분이랄까. 게다가 나(와 남편) 말고 아무도 없어.. 세 번째 봉을 오를 때도 쇠줄 등장. 그래도 요령이 붙어서 처음보다는 수월하게 올라갔다. 그때부터 쉐락볼튼까지는 바위로 이루어진 드넓은 평원이 나오는데, 참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지형이다. 이게 막 아름답다, 멋지다 이런 풍경이 아니라 뭐지 이거? 허 참 이런 리액션을 부른다. 아마 우리가 갔던 날 날씨가 안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래에 링크한 블로그에 가면 멋진 여름날의 쉐락볼튼을 볼 수 있다. 완전 눈호강..
ramblesroundtheworld.com/kjeragbolten-hike-complete-guide/
Kjeragbolten Hike: A Complete Guide | Rambles Round the World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one of Norway's best hikes: Kjeragbolten hike! This was our favorite hike on our trip to Norway, don't miss it!
ramblesroundtheworld.com
그래도 우리가 갔던 날도 충분히 매력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기분은 평생 못 느껴볼 것 같아서.
위에서 말한 평원에서 드디어 사람을 만났다. 정확히는 만난 게 아니라 앞에 가는 게 보였다. 근데 유럽 사람들 정말 무서운 것이 남자는 닥터 마틴 같은 워커를 신고 있었고 여자는 청바지에 스니커즈였다. 아니 등산화 신고도 힘든데 그 착화로 어찌 오셨소. 더 충격적인 건 사람이 반가워서 시야에 두고 싶었는데 너무 빨라서 따라갈 수가 없었단 것이다..
평원 이후 작은 물을 몇 개 건너고 도대체 이렇게 계속 가면 정말 쉐락볼튼이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마지막 고비인 거대한 돌무더기 넘어가기를 맞이하게 되고 그것만 넘으면 쉐락볼튼이다! 도대체 미리 올라간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건가 했는데 죄다 여기 있었다. 닥터 마틴+스니커즈 커플도. 한 10명 남짓? 날씨가 안 좋고 거의 비수기의 시작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고 덕분에 사진 찍는 줄도 길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을 안 찍을 수가 있나? 하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휴대폰을 맡기고 남편과 함께 돌 가까이 갔는데(다행히 옆에 큰 바위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건 아니고 뒤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생각보다 쉐락볼튼을 지지하는 거대한 바위와 쉐락볼튼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나는 도저히 못 가겠더라. 포기하고 왔더니 휴대폰 들고 있던 사람이 무서우면 안 가면 된다고 괜찮다고 해서 위로가 됐다. 남편 사진을 찍어주는데 마음이 조마조마.
역시 앉아서 배를 좀 채우고, 저 계란 바위 말고 옆의 평평한 벼랑에 반 엎드려서 뤼세피오르드 구경도 했다. 몇몇 사람이 내려가길래 날씨도 점점 더 안 좋아지고 또 둘만 걷기는 무서워서 부랴부랴 따라 나섰다. 처음에는 잘 따라가는 듯 했으나, 역시 서양인들과 격차는 벌어지고 이미 나는 그들을 놓쳤고 아까 그 평원에서는 설상가상 짙은 구름과 함께 작은 우박이 내렸다.. 사실 방향은 하나지만 평원이 워낙 넓고 우박+비+바람으로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는데다 약간 조급한 마음이 들자 이정표인 'T'가 그려진 돌이 잘 안 보였다. 길을 잃을 뻔하면 겨우 이정표를 찾고 또 잃을 뻔하면 이정표를 찾는 식으로 겨우 세 번째 산을 내려오는데, 그때 올라가는 사람들ㅡ쇠줄 잡고 올라가는 산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뿐 아니라 짐이 되는 스틱을 든ㅡ을 만나 짠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가야 되냐고 각각 두 명이나 물어봤는데, 여기만 일단 올라가면 괜찮다고 말해주면서도, 역시나 짠했다.
올라갈 때는 길을 모르는 채로 가지만, 같은 길로 내려가는 이상 길을 알기 때문에 오를 때보다 시간이 훨씬 짧게 느껴진다. 어디서도 못할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비록 처음엔 너무 힘들었지만 올라가길 정말 잘했다 생각했다. (안 올라갔으면 후회할 뻔했다고 쓰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안 올라갔으면 웬만하면 후회하진 않겠지. 안 올라간 결정을 정당화하려 노력했겠지.) 네 번의 산행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이기도 하고. 블로그를 쓰다 보니 쉐락볼튼 간 날은 쓸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많은지 남편에게 "나 쉐락볼튼이 정말 좋았나봐. 쓸 말이 너무 많아"라고 하니 그게 바로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이유라고 하네.ㅋㅋ 그래서 그럼 군대가 좋았던 거냐고 물어보니 그렇다기보다는 기억에 많이 남는 거라고 포장하는데, 글쎄 이 경험에 비추어보면 계속 이야기하는 건 기억에 남아서이기도 하지만 좋아서이기도 한 건데. 아무튼 계란바위 때문이 아니라 트레킹 코스 때문에 한 번 더 가보고 싶긴 하다. 코스가 예술이다. 10km, 570m의 elevaton, 6시간 걸린다는데 우리는 목적지 체류시간까지 합쳐 등반 시간이 5시간 정도였다. 날씨가 오후에 더 안 좋아지니 얼른 갔다오자는 생각에 좀 빨리 움직였을 수도 있겠다.
따뜻한 차에 앉으니 기분이 너무 좋고 점심 겸 콜드푸드를 이것저것 먹었다. 아직 1시가 좀 넘은 정도였기에 남편만 괜찮다면 꽤 긴 이동도 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어디겠는가? 프라이케스톨렌, 쉐락볼튼을 갔으니 다음은 무조건 트롤퉁가다. 그 자리에서 오따로 가기로 결정. 주차장을 떠나 아래 지도에 표시된 경로로 운전해서 가는데, 이 길에서도 차는 우리뿐이고 풍경은 말도 안 됐다.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느낌. Fv986, Fv987, Fv337, Rv9 도로까지 노르웨이의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는 아니지만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물론 어제도 구글스트리트뷰로 실컷 봤다..
이런 풍경이 앞에 펼쳐지는 멋진 휴게소에서 쉬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인 우리는 오후 5시에 오따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은 날만 올라갈 수 있고, 이틀 연속 산행으로 지치기도 했으므로 쉬기도 할 겸 숙소를 3박으로 예약했다(물론 오따로 가는 길에 예약함^^).
긴 하루였다. 물이 잘 나오고 투숙객이 우리밖에 없는(!)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누웠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알람 없이 잘 수 있다. 내일은 정해진 일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