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a reader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winterwald 2024. 2. 29. 17:07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신성아, 마티, 2023

 

내 전공은 안 어울리지만(어울리나?) 정치외교학이다. 세상 돌아가는 거에 관심 많았던 시절의 방증이랄까. 학문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정치를 재미나게 배웠다. 선거제와 정당론은 아직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주제다. 그런데 내가 현실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는 한 배운 지식을 써먹을 일은 별로 없었다. 선거구제가 바뀔 때 공부해서 설명해줄 수 있는 정도?ㅋㅋ 하지만 이건 정치 전공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한편 넓은 의미의 정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중학교 일반사회 시간에나 잠깐 나오려나. 나는 어린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이 정의를 다시 한 번 마음에 깊게 새겼는데, 어린이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부터 시작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고, 그들에게는 생활 속 정치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상 정치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다루는 아주 많은 그리고 깊은 주제들이 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가정 내 정치였다. 저자는 정치가 가장 들어오기 어려운 영역이 가정이라고 말한다. 어린 아이가 암에 걸리고 누군가 24시간 돌봄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가족 내의 정치는 작동하지 않았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설득해 어떤 해결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사회와 개인이 가진 (근거없는) 신념은 공고했고 엄마인 저자는 결국 돌보는 이의 역할을 홀로 떠맡게 된다. 갓 엄마가 된 사람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나는 내가 속한 영역에서 어떻게 정치할 수 있을지 (과연 정치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등교를 준비하던 아이가 코피를 흘렸고, 멈추지 않았고, 더 상급병원으로 이동하다가 국립암센터에 도착해 악성질환 진단을 받는다. 불과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그날로부터 1년 6개월간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운 극적 긴장 속에서 24시간 대체 없는 간호를 이어가며 저자는, 어떤 엄마도 꺼낼 수 없던 어렵고 무거운 질문을 내놓는다.” 

책 소개는 이렇고, 내가 신뢰하는 두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해서 재난 앞의 개인이 쏟아낸 고백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사실은 <질병, 돌봄, 국가, 가족, 개인>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거기에 저자 개인의 경험과 느낌을 버무린 재주가 거의 기예에 가까웠다. ‘노련한 소설, 하품 나오는 이론서는 물론이고 논픽션의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는 윈덤캠벨문학상의 수상작들도 이렇게 보편에 가까운 주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경이롭다.’는 알라딘 100자평처럼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건 저자에게 이 문제가 너무도 처절하고도 급박한 자기 자신의 문제였기 때문이겠지. 숨가쁜 와중에 분노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렇게 무겁고 아름답고 중요한 기록을 남겨주어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