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최근 내가 '아름다움'에 굉장히 예민할 뿐만 아니라 집착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급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빌린 책이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과 최재천이 엮은 <감히, 아름다움>이다.
뒤의 책은 아직 읽지 못했고 행복의 건축을 2/3가량 읽었는데, 그의 소설은 3장도 채 못 읽던 내가 이 책은 엄청난 속도로 읽어내려가고 있다. 사실 행복의 건축은 내가 궁금해하던 주제에 대해 답을 줄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엄청난 수확을 한 느낌이다. 최근 읽은 승효상씨의 <건축, 사유의 기호>와는 같은 대상을 두고 다른 의견을 펼쳐내는 부분이 있어 비교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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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건축의 의미 28p.
9. 따라서 건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독특하면서도 힘겨운 요구가 따라온다. 우리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우리 자신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설사 전부 비닐 소재여서 개량을 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 환경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불편한 일인지 몰라도 우리는 벽지의 색갈에 취약하며, 한심한 침대 커버 때문에 하려던 일을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동시에 건축은 우리의 불만을 아주 조금밖에 해결할 수 없으며, 악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전개되더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건축은 아무리 성취도가 높다고 해도 늘 작은 부분을 구성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며(값이 비싸고, 파괴되기 쉽고, 도덕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현 상태에 저항한다. 더욱 거북하게도 건축은 우리에게 행복은 종종 과시하지 않는, 영웅적이지 않으 특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넓게 펼쳐진 오래된 마루 널에서나 석고 벽에 밀려드는 아침빛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상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극적이지 않은 또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의 장면들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우리가 그 뒤에 놓인 더 어두운 배경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1장을 다 사용해서 건축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는 마지막 9에서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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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집의 이상 161p.
6.
이상에만 눈을 맞추었을 때 생기는 곤혹스러운 결과는 그것이 결국 우리를 슬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아름다울수록 우리는 더 큰 슬픔을 느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빵 몇 덩어리를 부지런히 나라는 엄숙한 표정의 어린 소년을 그린 피터르 데 호흐의 그림이나 존 우드 2세가 배스에 세운 로열 크레센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될 순간을 예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우울이 뒤섞인 묘한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완전성에 기쁨을 느기고, 이런 것을 만날 만큼 축복을 받는 경험도 참으로 드물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울을 느끼는 것이다. 흠 없는 대상을 보면 우리를 둘러싼 범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늘 바라는 것에 비추어, 우리 삶이 늘 얼마나 불완전한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피터르 데 호흐의 인물들과 로열 크레센트의 곡선은 보통 우리의 일상을 채색하는 감정들과 대조되는 면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흔들어놓는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몸짓이나 신뢰와 의무감으로 가득한 아들의 표정을 보면 우리 자신의 냉소와 퉁명스러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로열 크레센트는 그 엄숙한 위엄으로 우리의 수많은 야심의 사소하고 혼란스러운 본질을 드러낸다. 예술 작품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기독교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이 자극하는 슬픔에 특히 민감했다. 중세의 사상가인 생 빅토르의 후고는 이렇게 말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우리는 물론 기쁨을 경험한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공허감도 경험한다." 종교의 설명에 따르면, 심리핮거으로 흥미로운 만큼이나 이성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슬픔을 느끼는 것은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가 에덴 동산에서 한대 누렸던 흠 없는 완벽한 삶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천국에서 이런 숭고한 삶을 다시 이어가겠지만,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지상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사라졌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성스러운 것의 한 조각이며, 그것을 보면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삶에 대한 상실감과 갈망 때문에 슬퍼진다. 아름다운 대상에 새겨진 특질은 죄로 물든 세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신의 특질이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유한하고, 그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공을 많이 들이기 때문에 인간이 보통 도달할 수 없는 완전성을 어느 정도는 갖출 수 있다. 예술작품들은 우리가 행동이나 생각에서는 자주 다가가지 못해도 여전히 갈망하는 선의 달곰쌉쌀한 상징들이다…(중략: 작품을 보면서 삶에서 잠시 빠져나와 작품에 내재된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 본질이 삶에 없음을 슬퍼하는 사람의 이야기).
이 남자의 슬픔을 보다 보면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간은 우리 인생이 여러 가지 문제들로 가장 심각할 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낙담한 순간들은 건축과 예술로 통하는 입구를 활짝 열어준다. 그러한 때에 그 이상적인 특질들에 대한 굶주림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이다…(후략).
7.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을 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만, 우리의 진정한 욕망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기보다는 그것이 구현하는 내적인 특질을 영원히 차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대상을 소유하면 자신에게 그것이 암시하는 미덕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음을 불현듯이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이 자동적으로 또는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만 지나면 우리에게 스며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아름다운 것을 구매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갈망을 처리하는 가장 무미건조한 방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와 자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감정에 대한 가장 무딘 반응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우리 자신, 우리의 삶에 완벽한 선, 완벽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완전한 아름다움과 가까운 예술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슬퍼진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그 재능 자체가 나에게 없는 것이 슬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뿐만 아니라 그 내적 특질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