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0 포르투
쓰려고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이지 good old days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인생에 이런 시간이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0909 포스팅에서 어디까지 썼는지 모르겠지만,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까지 500km 넘게 달렸고, 포르투에 들어와서는 한국 같은 운전문화 + 수많은 차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길을 헤매다 에어비앤비 집앞에 도착했으나 주차 난이도가 극상이라 한참을 끙끙댔다. 겨우 들어간 집은 크고 아늑했고, 나가서 현지인들밖에 없는 (내 입맛에는 그저 그랬던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침에 친구랑 내가 누워있는 동안 남편이 갓 구운 따뜻한 빵을 사왔다. 물론 유럽 어디에서나 아침에 따뜻한 빵을 구할 수 있다. 그치만 가격이.. 우리가 스위스에 있다 와서 그랬을까 나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저렴했다. 이것 참 호사라며 먹고서는 오전에 밖으로 나갔다.
여름의 기운이 채 다 가시지 않은 날씨와 청량함을 내뿜는 아줄레주가 우리를 맞았다.
사실 오후에 예약해둔 그라함 투어를 빼면 정해둔 일정이 없었다.
별 목적 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선물 상점들 구경을 하고 포르토 대학 앞 공원에 앉아서 간식도 먹고 하다가, 그래도 유명한 곳을 가보자 싶어 렐루 서점으로 갔다. 생각보다 줄이 길었고, 표를 사는 곳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거대한 공간에 여러 개의 포스들, 기념품을 파는 매대, 수많은 코인락커까지. 어느 곳에서나 서점 구경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곧 들어갈 곳이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사람들이 가득했고, 서가에는 관광객을 노린 컬렉션이 다수였다.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려고 들어갔음에도 사고 싶은 책이 없었다. 그냥 내부와 서가가 멋져서 아 조앤이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나왔다.
포르토에서 제일 유명한 다리를 걸어서(!) 건너 도루강의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리에서 내려와 우회전, 강을 따라 걷다 한참 언덕을 올라가 도착한 곳은 Graham's port lodge. 이 구역에 여러 와이너리가 있는데, 우리는 친구가 미리 예약해둔 그라함으로. 생각보다 멀어서 살짝 지각했는데, 다행히 곧바로 투어에 합류할 수 있었다(지금 합류라는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국어사전에 '끼다'를 검색하고 있었다..). 10-15명 정도로 이루어진 영어투어인데, 가이드도 친절하고 질문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영국 아저씨와 미국 아저씨의 지식 배틀+질문 배틀이 시작되어서 나중에 좀 지루해졌지만.. 포트 와인의 역사나 포도 재배지역, 수확방식 등을 배울 수 있어서 전반적으로는 흥미로웠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면 테이스팅 시간인데, 예약해놓은 코스를 미리 테이블에 준비해준다. 우리는 세 명이라 하나 정도만 프리미엄으로 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이게 맛있다 저게 맛있다 했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난다(이 여행기 전체에 걸쳐 이 말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 미리 슬프다). 포트 와인 자체가 꽤 단 편이어서 개인적으로 많이 마시기는 좀 힘들었고, 이렇게 특별한 기회에 마시는 게 아닌 이상 딱히 찾아 마실 일은 없겠다 싶었다. 친구는 기념으로 미니어처 6개가 든 박스를 하나 사긴 했다. :) 다만 술을 다 마시고도 다른 사람들 다 갈 때까지 꽤 오랫동안(친구와 거의 6개월 만에 만났음!) 이야기를 했는데 그 시간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마음 맞는 사람과 이렇게 편하게 즐겁게 한국어로 이야기한 게 얼마만이지, 스르르 마음이 풀리는 시간.
이야기하고 언덕을 내려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다시 강 북쪽으로 올라갈 때는 위에 있는 높은 다리가 아닌 아래에 있는 다리로 걸었다.
마트에 가서 호박과 당근 등을 사서.. 우리가 들고 온 중면+진간장을 더해 간장국수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ㅋㅋㅋㅋㅋㅋ 우리도 유럽에 6개월째였고 친구도 여행한지 10일차라 아무도 메뉴에 불만이 없었다. 행복했다. 당시엔 이만큼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남편의 평생 친구이자 나의 10년지기인 친구와 포르투에 함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