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the place

2020/09/14 보르도

winterwald 2020. 7. 16. 16:10

와. 거의 한 달만에 쓰는 여행기! 이렇게 게을러서야 뭘 하겠냐는(비약이지만, 거짓도 아닌) 생각을 하면서 시작.

 

전날 저녁 탕진잼으로 맛있는 음식과 술을 야무지게 위장에 집어넣고는 토요일 아침 조금 늦게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여기서부터 좀 꼬였다. 일정이 조금씩 딜레이되면서 원하는 것들을 못 했기 때문. 숙소가 외곽에 있어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니 거의 11시가 다 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도심이 크고, 광장이 거대했으며 그래서 눈이 시원시원했다. 

 

보르도는 무조건 보르도 와인이 아니겠는가. 와인박물관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내가 크기 때문에 시내 안에서도 트램을 타야 하고, 숙소까지 가는 데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니 그 두 가지 비용 + 한 가지 액티비티만 더 해도 보르도 시티패스 24시간권(29유로)을 사는 게 낫겠다는 판단. 투어리스트 인포에 가서 일단 시티패스를 두 개 사고, 당일 예약 가능한 와이너리 투어가 있는지도 알아봤다. 없었고, 무작정 찾아가야 하는 걸까 고민하다가 시티패스로 와인박물관 입장 가능 시간이 12시까지라 일단 거기부터 가기로 했다. 시간이 없었어!

 

https://www.visiter-bordeaux.com/en/bordeaux-citypass.html

 

Bordeaux CityPass | Bordeaux Tourism & Conventions

Through ancient maps, instruments, models and portraits of famous Bordelais (ship makers, adventurers, corsairs, etc.), this new museum brings Bordeaux’s maritime past to life again, from Burdigala to the contemporary era. With your CityPass: €5 €3

www.visiter-bordeaux.com

보르도는 까눌레의 고향이기도. 몇 가지 유명한 브랜드가 있는데 baillardran도 그 중 하나.

까눌레는 보르도의 Couvent Des Annonciade(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구글 지도에 검색해보니 수도원이 나름 도심에 있다. 시골 어느 한적한 곳에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가게 사진은 보르도 시내에서 구경할 때 찍은 것이고, 먹는 건 다음 날 생떼밀리옹 가서 사먹었다. 까눌레를 위키에서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고종은 커피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각종 디저트의 열렬한 애호가이기도 해서, 창덕궁에서 사용하던 까눌레 틀이 지금도 국립고궁박물관에 가면 있다는 tmi ㅎㅎ 

 

각설하고, 12시 전에 가까스로 와인 박물관(La Cité du Vin) 도착. 와인의 역사부터 제조 원리, 종류, 여러가지 체험존까지 정말 많은 내용과 볼거리가 있는 곳. 3시간 넘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건 멀티미디어 자료 + 체험존 덕분. 역시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지식은 딱히 없다.. 최상층에 올라가면 테이스팅을 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시음은 입장료에 포함). 나는 화이트, 남편은 레드를 마셨는데 둘다 보르도산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마신 게 너무 맛있어서 1층 샵에서 사고 싶었는데 같은 건 없어서 제일 비슷한 걸로 한 병 사는 걸로 마무리.

 

와인 박물관을 나와서 정처없이 좀 헤맸다. 이때 동선+시간 낭비가 좀 심했는데, 보르도에서 또 뭐가 유명해? 하다가 물의 거울(Le miroir d'eau)을 보러 투어리스트 인포에서부터 걸어간 것. 세계 최대의 reflecting pool이라고 하는데, 야경이 제맛이라고 해서 밤에 다시 오자 했으나 주경도 멋지더라. 사진이 잘 담았는지 모르겠다. 물이 나오면 역시.. 세계 어디나 어린이들이 뛰어다닌다. 

 

시티패스 안에 포함된 시티투어버스를 타러 갔는데, 시간이 영 맞지 않아 시티투어트레인(?)을 탔다. 설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끼고 빈티지 기차라 해야 하나, 그런 것을 타고 구도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 그런데 애초에 타고 싶었던 버스도 못 탔지, 이 빈티지 트레인은 충격흡수장치가 전혀 없는지 엉덩이가 너무 아프고 설상가상 이어폰의 설명도 잘 들리지 않았다(잘 안 되는 영어듣기는 덤). 사실 아침에 와인 박물관 가기 전에도 간발의 차로 투어버스를 못 탔고, 이 트레인 뭐시기도 성에 차지 않으니 남편의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타기 전보다 내린 후 기분이 더 안 좋아지는 매직. 

 

그래서 내린 곳 근처의 유명한 식당에서 고기를 뜯기로-_- 했다. 상호는 L'Entrecôte이고, 자세한 사항은 아래 지도의 리뷰를 눌러서 확인하시면 되겠다. 그만큼의 고기를 그 가격에 먹는다는 점에서는 꽤 괜찮은 가성비이고, 수북이 쌓아준 감자도 맛있으나, 나는 당시 고기가 그렇게 당기던 상태는 아니어서 그저 그랬다. 보르도니까 물론 와인도 한 잔 곁들였다.

 

 

물의 거울(Le miroir d'eau)

 

구시가지에서 열린 축제

고기를 먹으니 너무 배가 불러서, 소화시킬 겸 물의 거울을 다시 보러 가자 싶어 시가지를 천천히 가로질러 걸었다. 해 지기 전 거리를 꽉 채운 악대(?)를 봤을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강변으로 나오니 축제 인파로 온 거리가 꽉 차 있었다. 아름다운 야경을 찍기는 불가능했고.. 더 사람이 몰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기 전에 얼른 숙소로 가기로 결정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니 (보이지는 않는) 먼 곳에서의 불꽃놀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축제 때문에 통제한 도로가 많아서인지 버스가 제 시간에 안 와, 이 밤에 집에 못 가는 것은 아닌가 잔뜩 맘 졸였던 기억이 난다. 

 

전반적으로 뭔가 안 맞아 떨어지는 하루였다. 시티버스 못 타고, 와이너리 예약도 못했고, 점심도 못 먹었고, 이런 저런 구경이 맘에 쏙 들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둘다 지치고 서로 짜증내고.. 몸도 마음도 피곤한 하루였다. 그래도 내일 어떻게든 와이너리를 방문하자, 다짐하며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려 노력했다. 혼자 다니면 혼자 다니는 대로, 여럿이 다니면 여럿이 다니는 대로 장단점이 있는데, 이 날은 나 혼자라면 그냥 넘겼을 짜증이 증폭되고 전염되는, '둘'의 단점이 더 부각되는 날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내가 선택한 나의 여행메이트. 이번 여행의 메이트일 뿐 아니라 앞으로 대부분의 여행에서도 메이트일 사람. 하긴 매일매일이 더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보르도는 맘에 드는 도시였다. 개인적으로는 프라이부르크와 비슷한 느낌. 깔끔하고, 아주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구시가지가 아름답고 소소하게 구경하며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도시라는 점에서. 같은 남프랑스지만 동쪽의 프로방스-코트다쥐르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고, 보르도 근처의 다른 와인산지들과 리모주를 묶어 한 번 더 가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