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기한이 있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유용하다. 기한에 닥쳐 허접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기한이 없어 영영 아무 것도 안 내놓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낫기에. 어제 트위터에서 타고나기를 에너지레벨이 높은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글을 보았는데, 십분 동의한다. 하이텐션 인간들이 뭐라도 할 거고, 그러면 돋보일 테고, 세상을 주도하게 되겠지. 로우텐션 인간들은 방에 누워있거나 혼자 걸어다니거나 웹상에 있다.. 그나마 웹이 부상한 시대라 이 정도지, 19세기 이전에 태어났다면 로우텐션이 (흔히 말하는) 성공을 하기는 더더욱 힘들었을 테다. 뭐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하이텐션 로우텐션을 떠나서 맞는 말이니 변명이 되지는 못 한다. 다만 그게 남보다 힘든 건 사실이라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언제 봐도 풍경에 빠져들고 생활의 배경으로 틀어놓아도 손색이 없다. 내친 김에 OST도 찾았는데 캐스커의 준오님이 만든 음악이라 더 정감이 간다. 시골생활이 리틀 포레스트 같지 않다는 걸 안다. 당장 시골로 들어간 엄마 아빠의 생활만 봐도 할일이 산더미인데다 저렇게 깔끔한 주변 경관 깔끔한 이웃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내게는 너른 자연이 절실하다. 찔끔찔끔 있는 나무나 풀 말고 숲이나 산 크게 흔들리는 나무들이 필요하다. 나는 고작 6-7년을 시골에 살았지만, 그 시간은 내 생애 첫 6-7년이었기에 아무래도 내 바탕이 되어버린 듯하다. 김태리의 말처럼, 서울을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게 맞는 표현일 테다. 내가 애초에 속한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파릇할 때에 읽었어야 할 박경리의 토지를 이제서야 시작해볼까 한다. 1960-2000년 사이의 한국소설이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 전시처럼 아득한 옛날이 아닌, 그래도 내가 태어난 시점과 멀지 않은 시대. 사람들이 조금씩 잘 살기 시작하고, 먹고 사는 것 외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 (물론 토지의 배경과 일치하진 않지만ㅋㅋㅋ) 문학사적으로도 기막힌 서사와 아름다운 문장이 공존했던 시기인 것 같다. 이청준 박완서 박경리 이런 분들 있잖아.. 어제 토지의 서문을 읽었는데 이런 힘 있는 문체와 적확하고 아름다운 단어 사용 마지막으로 언제 봤나 싶으면서 소설 시작도 안 했는데 거기에서 이미 감탄했다. 그 문장에서 받은 느낌을 생각하며 타자를 치고 있자니 내 글이 새삼 조악하게 느껴진다.
2021도 1/4이 지나갔다. 시간에 무심히 흘려보냈던 것들, 성취하려고 애쓰던 것들,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뒤엉켜서 정신없이 보냈다. 다가오는 시간에는 누구, 무엇을 만나게 될까. 누구, 무엇을 떠나보내게 될까. 언제나처럼 절반은 두려워하고 절반은 무심하게 오는 날들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