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2018.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믿고 집어들게 되는 정영목 번역가의 책들. 번역을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한 그가 번역에 대한 쓴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다.
1. 일단 멋진 제목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책이 번역 에세이라는 것만 알았지 제목의 의미를 전혀 종잡을 수 없었는데 다 읽고 나니 책 전체에 흐르는 문제의식을 깔끔하게 드러내보인다 할 수 있다. (편집자가 지어준 제목이라는데 대단하십니다..)
지금의 번역은 옳고 그름에만 치중되어 있다. 이는 외국어를 한국어로 얼마나 잘 옮기느냐가 번역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사실 그걸 번역이라고 보면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번역에 대한 논의가 오류를 잡아내는 등 기술적인 영역에 한정되고 있다.
그러나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단순히 옮기는 것 이상이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이는 애초에 불가능하며(읽기 자체가 해석이다), 번역은 출발어와 도착어의 이항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항을 왔다 갔다 하며 제3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에 가깝다("사실 의미는 텍스트를 읽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상호작용 가운데 동적으로 형성되어 나아가는 것이고, 그나마도 흔들린다"[158p]). 출발어와 도착어 자체가 이미 완전하지 않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언어는 성기고, 번역의 반은 상상인 것이다. (167p)
언어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 출발어에서 도착어로 완벽하게 옮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관심이 옮겨지면, 원문의 정확성을 포기한 가독성/번역 같은 번역 같은 논쟁이 불필요해진다.
2. 번역의 결과는 이미 번역가 안에 주어져 있다. 번역이 기술 같지만 사실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총체적인 방식, 사람이 글을 읽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그 번역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기술 수준이 비슷하다면, 결국 좋은 사람(너무 거대한 말이지만)이 좋은 번역을 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하면 너무 비약일까?
그러나 영어든 한국어든 어떤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일정한 선을 넘으면 모두 사고의 문제,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36p)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어떤 번역가가 이런저런 번역 방식을 의식적으로 선택한다기보다는, 그런 선택이 이미 번역가 안에 주어져 있는 것 같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번역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그가 선택을 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 사람의 이야기는 이미 자기 안에 주어진 것을 정당화 하는 말일 뿐이라는 것이다. (111p)
3.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가 참 좋았다. 번역가라는 직업의 본질을 예리하게 꿰뚫는 통찰력 있는 인터뷰어.. 언제나 믿고 봅니다 기자님
느슨해지려는 몸과 마음의 탄력을 추슬러주는 정영목의 도락은 등산과 클래식 공연 관람. 얼마 전에는 그가 사는 도시의 음악당에서 최다 관람 관객 2위로 뽑혀 부상을 받기도 했다고.…번역가의 가슴에는 원작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락시켰던 말의 부스러기가 쌓일 테지만, 연주자는 공연으로 작품을 끝없이 재해석할 수 있다. 연주자와 연주를 향한 그의 사랑에는 혹시 그런 특권을 향한 천진한 동경이 포함돼 있는 게 아닐까. (3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