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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te/a reader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는 다윈 spirit의 악의 기원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했다. 제목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한 것. 그런데 그럴 만도 했던 것이 다윈 영이 주인공의 이름이었고, 소년이 하나의 미스터리와 만나고 풀어가면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악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다.

배경이 가상의 국가인데다 작가의 문체가 독특해서 처음 보는 스타일의 소설이었다. 단어나 사유의 조합이 신선한데, 단순히 신선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심리나 풍경 묘사, 세계에 대한 통찰이 탁월하고 정확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

하늘에 옅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독립적으로 세상을 떠돌던 눈송이들이 땅에 닿는 순간 무명의 공동 무덤으로 합쳐져 들어갔다. 눈송이가 묻힐 곳을 고르느라 머뭇거리면 어떨까. 꽃잎이 묘비를 세우고 싶어 하면 어떨까. 바람이 자신의 묘비명을 걱정하면 어떨까. 자연이 명예욕이 없다는 건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는 데에는 무척 다행이었다. 3권 141-142pp

번역된 소설 느낌도 나고.. 영어로 번역해도 훌륭할 것 같다. 소설가 장강명은 이 소설을 사변소설이라 말했는데, 글쎄 플롯 자체가 탄탄해서 사변소설이라 부르면 너무 많은 면을 놓치게 될 것 같다. 훌륭한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그냥 박지리의 인장이 찍힌 박지리의 작품이다. 어떤 카테고리로 한정하기가 어렵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섬뜩했다. 후반부의 일종의 반전 자체에 놀라기도 했지만(전반부 사건의 범인을 맞추고 혼자 좋아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전개는 예측하지 못했다ㅜ_ㅜ 역시나 퍼즐을 잘 못 푸는 미스터리 독자), 인간 안에 있는 그 자신도 모르는 악이 더 소름끼쳤다. 어떤 사람은 아렌트와 연결시키기도 하던데 일리 있는 포인트인 것 같다. 내 안에 있지만 나도 모르는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