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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ste/a reader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스티븐 네이페,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 저, 최준영 역, 민음사

 

한국어판 제목을 잘 지었다. 원제는 Van Gogh: The Life(2011)인데, 뭔가 전기의 결정판 같은 느낌을 주지만 한국어로 번역하면 또 평범해지는 그런 제목. 한국어판 제목은 한국어 화자 사이에서 통용되는 '반 고흐'라는 유명한 화가 이름 뒤의, 진짜 인간 Van Gogh 판 호흐를 만날 수 있게 해줄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달까.

 

본문만 930쪽이다. 내지는 독특하게도 1면 2단으로 구성된 데다 왼쪽 정렬로 되어 있어 아무래도 1단보다는 훨씬 산만하고, 편집부와 디자이너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호흐의 머릿속에 들어간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원서 내지가 어떤지 궁금하다.

 

호흐의 그림을,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간 호흐의 본모습을 보는 것이 물론 알아가는 즐거움은 있었으나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이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형제가 보내준 돈을 늘 흥청망청 써버리고, 뻔뻔하게도 늘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고. creepy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구애방식까지. 사랑을 갈구했지만 사랑받지 못했고, 누군가를 사로잡거나 미쳐버리게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몇 가지의 직업을 거치면서도 성공하지 못했고, 화가로서 변변찮은 유명세를 누린 시간도 아주 짧았다. 그마저도 발작에 시달리던 때.

 

한 가지 생각에 무서울 정도로 몰두하는(사람들을 다 떠나게 만들어버린 바로 그) 성향이 그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핵심이었다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를 밀어내게 만든 그 성향 때문에 후대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되었다는 것이. 끝없이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고 그들과 충돌하면서 그만의 회화가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호흐의 죽음을 야기한 총상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죽음의 원인이 자살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흐의 죽음에 대한 네덜란드 Van Gogh museum의 공식 주장은 자살이다. 

 

www.vangoghmuseum.nl/en/art-and-stories/vincents-life-1853-1890/vincents-final-months

 

Vincent's Final Months

In his final months, Vincent van Gogh lived in Auvers-sur-Oise. The village was close to Paris and many artists lived here.

www.vangoghmuseum.nl

저자들은 총격이 배에 가해졌다는 것과, 자기 자신이 쏠 때에 비해 비교적 먼 곳에서 가해진 총격에 대한 총상이라는 점,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호흐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에 의한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 nyt 기사에서 호흐의 나무 뿌리(tree roots) 그림이 그가 총상을 입기 직전(당일)에 그려졌다고 주장함으로써 호흐의 죽음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van der Veen을 다루었다.

 

www.nytimes.com/2020/07/28/arts/design/vincent-van-gogh-tree-roots.html

 

A Clue to van Gogh’s Final Days Is Found in His Last Painting

A researcher says he has uncovered the precise location where the artist painted “Tree Roots,” thought to be the last piece he worked on the day he suffered a fatal gunshot wound.

www.nytimes.com

그리고 (오늘 알게 된 사실인데) 같은 날 Van Gogh Museum도 이 연구를 소개했다.

 

www.vangoghmuseum.nl/en/about/news-and-press/press-releases/discovery-of-the-place-where-van-gogh-painted-his-last-masterpiece-tree-roots

 

Discovery of the Place Where Van Gogh Painted His Last Masterpiece

in Auvers-sur-Oise a ceremony took place to reveal the place where 130 years ago, shortly before his suicide, Vincent van Gogh painted his final masterpiece, Tree Roots.

www.vangoghmuseum.nl

van der Veen의 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호흐의 죽음을 야기한 총상이 밀밭 근처에서 일어났다는 지금까지의 주장(까마귀가 나는 밀밭 그림과 강렬하게 연계되어 자살임을 암시하는) 뒤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나무뿌리의 위치는 밀밭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했던 것 같다 책에서.. 확실치는 않음)이며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고 연구자가 딱히 어느 의견을 옹호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책이 정말 길고도 길어서 중간에 지치기도 하지만 포기할까 하면 또 흥미로운 부분이 나와 완독할 수 있었다. 뒤로 갈수록 호흐가 더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읽으면서 욕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마음 아파하면서 책을 덮었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사람. 한없이 충만한 자기애와 끝없는 자기혐오를 능숙하게 오가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로부터 미움받고 수없는 절망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림이 있었던 사람. 그렇게 그림에만 매달리다가(그 방법밖에 없었기도) 결국은 자신의 그림을 이루어낸 사람.